일상/독서

2024 완독 23 - 희랍어 시간 / 한강

huiyu 2024. 12. 25. 19:33

P37.
칠월의 햇빛을 받은 강물이 거대한 물고기의 비늘처럼 뒤척이며 반짝이던, 당신이 문득 내 팔에 가무잡잡한 손을 얹었던, 그 손등 위로 부풀어오른 검푸른 정맥들을 내가 떨며 어루만졌던, 두려워하는 내 입술에 닿았던 순간들은 이제 당신 안에서 사라졌습니까. 그 낡은 다리 앞에서 당신의 딸은 유모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엄마를 부르고, 당신의 필름조각들을 호주머니에 넣은 뒤 천천히 몸을 일으킵니까.

이십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갔지만, 그 순간의 어떤 것도 내 기억속에선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뿐 아니라, 당신과의 가장 끔찍했던 순간들까지 낱낱이 살아 꿈틀거립니다. 나의 자책, 나의 후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당신의 얼굴입니다. 눈물에 온통 젖어 번들거렸던 그 얼굴. 내 얼굴을 후려친, 수년간 억센 나무를 다뤄 사내보다 단단했던 주먹.
나를 용서하시겠습니까.

용서할 수 없다면, 내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겠습니까.

P. 43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에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불가능한 오류다.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보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 걸.

당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희랍식 논증의 방식으로 이따금 나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무엇인가를 잃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할 때, 당신을 잃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얻게 되었는지. 보이는 세계를 이제 잃음으로써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P.44
그러나 계속 묻고 답합니다. 두 눈은 침묵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 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할 때, 진실 역시 어리석음에게서 영향을 받아 변화할까요. 마찬가지로 아리석음이 진실을 파괴할 때, 어리석음에도 균열이 생겨 함께 부서질까요. 내 어리석음이 사랑을 파괴했을 때, 그렇게 내 어리석음 역시 함께 부서졌다고 말하면 당신은 궤변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목소리. 당신의 목소리. 지난 이십 년 가까이 잊은적 없는 소리. 내가 아직 그 목소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다시 내 얼굴에 그 단단한 주먹을 날리겠습니까.



P. 123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고.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건 죄악이라고.
그러니까, 너에겐 아름다운 건 붐비는 거리였지.
햇빛이 끓어 넘치는 트램 정류장이었지.
세차게 뛰는 심장,
부풀어오르는 허파,
아직 따뜻한 입술,
그 입술을 누군가의 입술에 세차게 문지르는 거였지.

...

그 모든 뜨거움을 너는 잃었니.
너는 정말 죽었니.
세상에 잠긴 얼굴.
깊게 주름진 입가.
미소 띤 눈.
뻔한 대답을 하기 싫을 때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던 습관.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절한, 숨길 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소름끼칠 만큼
명확하게 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살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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