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깜빡할 사이에 저녁이 됐다.
“오늘도 아무것도 안 했네”
반성은 아니다. 단순한 감상이었다.
갓 상경해서 아무것도 없이 외톨이였던 나날이 지금도 그립다. 그건 마치 미술 시간에 새하얀 도화지를 받고 들뜨는 기분과 비슷했다.
도도 레도 미도 파도 어느 음이나 다 아름답다. 건반에 아름답지 않은 음은 하나도 없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피아노 레슨도 10년만에 일단락. 한 번 그만두면 못 치게 될게 틀림없지만, 지금의 나는 시작하기 전의 ‘치지 못하는 나’와는 틀림없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의 10년치의 즐거운 화요일을 토핑할 수 있었다.
p93
의사가 의자를 빙글 돌리면서 말하는데 말투의 느낌이 좋았다. 뭐가 어떻다고 설명하긴 어려운데, 느낌이 좋다는건 원래 그런거다. 그 목소리에는 온기가 있었다.
어른이 될 수록 많은 것을 알게된다. 나 역시 많은 것을 알게 됐다.
...
나는 무리하고 싶지 않은 어른이었다.
팬 체질이 아닌 나 자신에게 약간의 쓸쓸함을 느꼈다.
'최애'도 없다. 뭘 수집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컬렉션이 없다. 나는 오로지 나에게만 흥미있는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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