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2
“환자에서 환이 아플 ‘환’이잖아요. 자꾸 환자라고 하면 더 아파요.”
“게다가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호칭 싫어하는 분도 많아요. 그래서 은퇴 전 직함을 불러드리죠. 그러면 병마와 싸우려는 의지를 더 굳게 다지시는 것 같아요. 건강하게 일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바람이 가슴 한쪽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병원에서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의술이 될 수도 있어요.”
p23. 좌우봉원이라는 말이 있다. 좌우, 그러니까 주변에서 맞닥뜨리는 사물과 현상을 잘 헤아리면 근원과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공부의 원천이라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p.30. 우린 늘 무엇을 말하느냐에 정신이 팔린 채 살아간다. 하지먀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고, 어떻게 말하느냐보다 때론 어떤 말을 하지 않느냐가 더 중요한 법이다. 입을 닫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잘 말 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끔은 내 언어의 총량에 관해 고민한다. 다언이 실언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으려 한다.
p.34
“그냥”이란 말은 대개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p.43
내 발걸음은 ‘네’가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역시 사랑의 씁쓸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에 ‘너’를 알고 싶어 시작되지만 결국 ‘나’를 알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p45.
나 역시 나이가 들수록 유독 맛보고 싶은 음식이 있다. 대학 시절 학교 쪽문에서 호호 불어가며 먹던 칼제비의 푸짐함이 그립고, “이거 다 비워야 키큰다”며 할머니가 만들어준 콩국수의 맛도 잊을 수 없다.
돌이켜보면 그런 음식 곁엔 특정한 사람과 특정한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음식을 맛보며 과거를 떠올린다는 건, 그 음식 자체가 그리운게 아니라 함께 먹었던 사람과 분위기를 그리워하는건지도 모른다.
그리운 맛은, 그리운 기억을 호출한다.
p54
사과를 뜻하는 단어 ‘apology’는 ‘그릇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그리스어 ‘apologia’에서 유래했다. 얽힌 일을 처리하려는 의지와 용기를 지니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승리의 언어가 사과인 셈이다.
p55.
미안함을 의미하는 ‘sorry’는 ‘아픈’ ‘상처’라는 뜻을 지닌 ‘sore’에서 유래했다. 그래서일까. 진심 어린 사과에는 ‘널 아프게 해서 나도 아파’라는 뉘앙스가 스며 있는 듯하다.
p.63
대지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치고 사연없는 이가 없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몸뚱어리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우주만 한 크기의 사연 하나쯤은 가슴속 깊이 소중하게 간직한 채 살아가기 마련이다.
다만, 그러한 사정과 까닭을 너그럽게 들어줄 사람이 많지 않은게 현실인 듯하다. 우리 마음속에 그럴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가슴에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기 때문일까. 가끔은 아쉽기만하다.
p110
애지욕기생
“사랑은, 사람을 살아가게끔 한다.
p115
‘글’이 동사 ‘긁다’에서 파생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글쓰기는 긁고 새기는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 글은 여백위에만 남겨지는게 아니다. 머리와 가슴에도 새겨진다.
마음 깊숙이 꽂힌 글귀는 지지 않는 꽃이다. 우린 그 꽃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는다. 때론 단출한 문장 한줄이 상처를 보듬고 삶의 허기를 달래기도 한다.
p 121
,사랑에 빠지는 순간 상대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 하나의 시대이므로…
p.122
어느 작가는 “작은 인연과 오해를 풀기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읊조렸다. “우린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건지도 모른다”는 영화 대사도 한 번쯤 되새길 만하다.
…
사람이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삶이 아닐까?
p.133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유다이 :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해요”
료타 : “그건 그렇지만 회사에서 제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많습니다.”
유다이 : “아버지라는 일도 다른 사람은 못 하는 거죠”
p.136
꽃도 그렇지 않나. 화려하게 만개한 순간보당 적당히 반쯤 피었을 때가 훨씬 더 아름다운 경우가 있다. 절정보다 더 아름다운 건 절정으로 치닫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앞으로 더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순간 우린 살아가는 동력을 얻는다. 어쩌면 계절도, 감정도, 인연이란 것도 죄다 그러할 것이다.
p.153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딱 한 번이라도 좋다. 낡은 비디오테이프른 되감듯이 그때의 옛날로 돌아가자. 나는 펜을 내려놓고, 읽다 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활짝 편다. 너는 달려와 내 가슴에 안긴다. 내 키만큼 천장에 다다를 만큼 널 높이 들어 올리고 졸음이 온 너의 눈, 상기된 너의 뺨 위에 굿나잇 키스를 하는거다.
p162
기다린다는 것은 마음속에 어떤 바람과 기대를 품은 채 덤덤하게 혹은 바지런히 무언가를 준비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릴 때, 만남과 결과를 기다리는 순간에도 우린 가슴 설레는 상상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쩌면 구체적인 대상이나 특정한 상대를 능동적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기다림은 그런 것이다. 몸은 가만히 있더라도 마음만큼은 미래를 향해 뜀박질하는 일.
그렇게 희망이라는 재료를 통해 시간의 공백을 하나하나 메워나가는 과정이 기다림이다. 그리고 때론 그 공백을 채워야만 오는 게 있다.
기다려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있다.
p177
어떤 감정은 시간과 정성에 의해 느릿느릿 키워진다.
..
사랑은 감정과 타이밍의 결합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감정은 예측 불가능하며 타이밍은 더 예측 불가능하다.
…
어쩌면 예측이 가능한 감정은 사랑이 아닌지도 모른다.
p.205
우린 무언가를 정면으로 마주할 때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곤 한다. 글쓰기가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일도 그렇다.
대로는 조금 떨어져서 바라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한 발 뒤로 물러나. 조금은 다른 각도로. 소중한 것일수록.
p.232
격한 감정이 날 망가트리지 않도록 마음속에 작은 문 하나쯤 열어놓고 살아야겠다. 분노가 스스로 들락날락하도록, 내게서 쉬이 달아날 수 있도록.
p.248
종종 공백이란게 필요하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소중한 걸 잊고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 우린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어야 한다.
공백을 갖는다는 건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 힘으로 멈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홀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러니 가끔은 멈춰야 한다.
억지로 끌려가는 삶이 힘겨울수록, 누군가에게 얹혀가는 삶이 버거울수록 우린 더욱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p249
밀도 있는 여행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은 변하지만 사랑했던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p.250
“참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마르셀 푸르스트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야늠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 생겨나는 틈이다” - 폴 발레리.
우린 목적지에 닿을 때보다 지나치는 길목에서 더 소중한 것을 얻곤 한다.
어쩌면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도착’이 아니라 ‘과정’인지도 모른다.
p302
살면서 내가 용서해야 하는 대상은 ‘남’이 아니라 ‘나’인지 모른다고.
우린 늘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p306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린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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