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독서

2024 완독 6 - 약간의 거리를 둔다/소노아야코

huiyu 2024. 3. 8. 23:28

사실 ‘남들만큼’이란 개념은 매우 모호하다. 무엇을 근거로 ‘남들만큼’의 존재라고 부르는 것인지, ‘남들만큼’의 허용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기준은 없다.

좋은 시절이든, 힘든 시절이든 티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매사 결과는 내 몫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탓을 하지 않는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자기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지점이 발견된다. 나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나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도 나에게만 주어졌다.

역경 속에도 즐거움이 숨어 있고, 이를 재미있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경마저 평범한 일상 중 하나로 여겨야 한다. 조심스럽다기보다는 소심한 성격에 가까운 사람들은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데 재능을 보인다. 하지만 그 이상의 세계는 얻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재미가 없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은 죽지만 않으면 사는 것쯤은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길에서 처음 만난 아기 엄마를 도와 함께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것은 ‘약간의 도움’이지만, 상대방에겐 뜻하지 않은 행운이다. 나는 행운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하루아침에 지혜로워질 수는 없다. 사람은 오랜 세월 헤매야 하며,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고, 때로는 어리석음에 정열을 불태우다가 끝내는 자신에게 필요한 최고의 선택을 내리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여동생이 정신병원에 입원했어요.” “형님이 교도소에 수감 중입니다.”라고 아무렇지 않게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도망칠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저 현실을 받아들이고 병자나 노인처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하며 나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혹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상처 주지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매력적인 사람의 특징은 그에게 주어진 인생의 무게를 받아들이고 수용했다는 너그러움이다. 그들은 현실로부터 도망치지도, 몸을 숨기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만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 무거운 짐의 차이가 개성으로서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개성에 의해 키워진 성격과 재능이 아니라면 참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게 진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생은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희망을 걸고 기다려야 한다. 죽음 직전에 다시 살아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최후의 순간까지 내가 살아온 의미에 대한 해답은 정해지지 않는다.

사람들 모습 속에 절반의 악과 절반의 교활함이 감춰져 있음을 나는 비난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반쯤 교활한 인간에겐 어김없이 그만큼의 교활하지 않은 인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옳지 않아, 라는 나의 판단 뒤에는 저 사람에겐 배우고 감탄하기에 충분한 빛나는 무엇인가가 가려져 있다는 이야기다. 내겐 좋은 점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다면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겠다.

사람들은 남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소문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실상은 아무런 사정도 알지 못한다는 게 진실이다.

함부로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넘겨짚지 말자고 오래 전부터 스스로를 타일러왔다. 그 다짐은 이 나이가 되어서도 변함없다. 상대방을 위해 나의 희생을 감수하며 수고한 일이더라도 그가 고마움을 모른다고 해서 서운해한다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된다. 그럴 수도 있음을 인식하며 미리 각오해둬야 한다. 인간관계의 보편적인 형태는 서로 간에 뜻이 맞지 않고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오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관계가 틀어진다.

소문의 밑바닥에는 그 사람의 불행을 바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의 불행한 가정사나, 그가 숨기고 싶어하는 내면의 어둠을 소문으로 끄집어내 그를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싶다는 사악한 욕망의 표출이다. 이 욕망의 뿌리는 그 사람을 멸시하고 나보다 열등한 존재로 비하함으로써 나의 지위가 우월해지는 것 같은 착각, 다시 말해 자신감을 되찾아 행복해지고 싶다는 조작된 심리에 지나지 않다. 정보를 의심하는 것은 기본이다. 나만 해도 나와 관련된 말도 안 되는 소문들이 세상에서 진실처럼 전해진 경우가 많다. 나에 관한 정보가 이만큼 엉터리인 것을 보면 타인에 관한 정보들 중 상당수도 진실일 리 없다. 그래서 가십이나 소문에 귀를 닫아버렸다. 그가 왜 그런 인생을 살게 되었는지, 어쩌다가 그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눈빛, 누가 만들어냈는지도 모를 소문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다.

친구는 자녀가 아니다. 부모도 아니다. 남편도 아니다. 형제자매도 아니다. 연인도 아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친구로부터 의견과 감상을 요구받기 전까지 그들의 삶에 참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친구라는 입장에서 그의 성공과 건강을 남몰래 기도하는 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그 경계를 넘어서는 사람들이 꽤 많다. “저 사람은 평판이 안 좋아요. 어울리지 않는 게 좋겠어요. 괜히 당신까지 그런 사람으로 보이면 어떡해요.”라고 주제넘게 남의 인간관계를 결정지으려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내가 남편도, 아버지도 아니고, 자식도 오빠도, 애인도 아닌 사람의 평판까지 조심해야 되는 것일까. 평판이 나쁜 그의 지인이며 친구이기 때문에 멀쩡한 나까지 그와 비슷한 사람일 것이라는 편견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왕지사 사귀려면 평판이 무난한 자를 택하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날까지 세상의 오해와 잡음에 시달리는 사람들 곁에서 그들과 우정을 맺어왔다. 인생은 매순간 대가를 요구한다. 세상에 보기 드문 개성 강하고 똑똑한 친구들 곁에 머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인생을 알게 될수록 내가 얻은 것들 중 대부분이 우연에 따른 결과물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때부터 ‘감사’의 면목이 자연스레 몸에 새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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