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독서

2024 완독 4 - 그러라 그래 / 양희은

huiyu 2024. 2. 6. 23:07

완독 4 그러라 그래-양희은
p.42
세상일에 요령이나 지혜가 쌓이고, 하는 일이 무언지를 '쬐꼼' 알 만한 때, 이미 일은 나를 떠난다. 내가 밀려난다. 그게 요즘 순리다.
노래가 무언지 '쬐꼼' 알 만한데 더 이상 노래할 기회가 많지 않다. 그러니 할 만할 때 제대로 하려면 건강해야겠지. 즐겁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기, 이것이 꿈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올인 해야 한다는 점도 잊지 않아야겠다. 집중해서 전력투구하기! 이것 역시 건강해야 가능하구나. 모든 것의 결론은 결국 건강이겠다.

p48
옆에서 자분자분 얘기 걸어주고 말대꾸해주는 말동무가 있는 게 나이 들면 제일 중요하고 소통 가능한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산단다. 그런데 엄마는 허구한 날 바쁘고 저녁에야 들어오니 종일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하루하루가 적막했겠다.

p.56
우리 삶은 죽고 싶다고 해서 죽어지지도 않고, 살고 싶다고 해서 살아지지도 않는 것 같다. 인간의 목숨이란게 미리 짜인 각본처럼 예정이 돼 있나 싶기도 하다.
나는 기본적으로 기쁨이 넘칠 결혼식엔 잘 안 가지만, 장례식장에는 최대한 가는 편이다.
...
떠나간 사람들에 이어 나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난 묘비명도 무덤도 없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 다녀간 흔적 없이 그렇게 사라지고 싶다. 그저 노래만이 남아서 세상 이곳저곳에서 들리길 바란다.


p.67
작은 돌부리엔 걸려 넘어져도 태산에 걸려 넘어지는 법은 없다고, 뭐 엄청 대단한 사람이 우리를 위로하기보다 진심 어린 말과 눈빛이 우리를 일으킨다는 걸 배웠다. 세상천지 기댈 곳 없고 내 편은 어디에도 없구나 싶을 때, 이런 따뜻한 기억들이 나를 위로하며 안 보이는 길을 더듬어 다시 한 발짝 내딛게 해준다.

p96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박이 터지는 건 어쩌면 운이지만, 정성은 이쪽 몫이다. 잊지말자.

p117
고백하건대, 별나게 겪은 그 괴로웠던 시간들이 내가 세상을 보는 시선에 보탬을 주면 주었지 빼앗아간 건 없었다. 경험은 누구도 모사할 수 없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니까. 따지고 보면 '결핍'이 가장 힘을 주는 에너지였다. 이왕이면 깊게, 남과는 다른 굴절을 만들며 세상을 보고 싶다.

p.132.
어떤 나이든 간에 죽음 앞에서는 모두 절정이라 치면,  그래, 지금이 내 삶의 절정이고 꽃이다. 인생의 꽃이 다 피고 또 지고 난 후라 더 이상 꽃구경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니 지금이 가장 찬란한 때구나.

p137
내 삶에도 틀림없이 저렇게 중요한 부분을 옥죄고 있는 편견, 열등감, 자격지심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우리는 누구나 가슴속에 상처 입은 어린아이를 품고 살지 않는가?

p138
어렸을 땐 흉터 하나만 갖고도 친구와 종일 얘기 나누며 놀 수 있었는데, 어른이 되면서 모든 상처를 영돌이처럼 멋진 털로 그럴듯하게 가리고 아픔이나 상처는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산다. 자신의 아픈 부분을 더 깊숙이 조여서 영돌이처럼 버둥대며 뻗을 때도 있다.
털어내면 아무것도 아닌 상처, 비슷한 아픔 앞에 너면 차라리 가벼울 수도 있는데... 상처는 내보이면 더 이상 아픔이 아니다. 또 비슷한 상처들끼리는 서로 껴안아줄수 있으니까, 얘기 끝에 서로의 상처를 상쇄시킬 수도 있다. 같은 값을 지워나가듯 그렇게 상처도 아문다.
왜 상처는 훈장이 되지 못하는 걸까? 살면서 뜻하지 않게 겪었던 아픔들을 수치스러워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대체 어떻게 아무런 흉도 없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은 데 겪은 만큼'이란 말이 있다.
나는 내가 가진 상처 덕분에 남의 상처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한 눈과 마음이 있는 게 꼭 나쁘지먀은 않은 것 같다.

p116
하지만 어느 날 깨달았다. 마음이 너무 망가져서 자기 속 이야기를 끄집어내지도 못하고 글로도 쓰지 못하는 누군가가 자신과 비슷한 사연을 방송으로 들을 때 조금은 자기 객관화를 시킬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보듯 거리를 두고 자기 인생을 보게 되는 것. 그러고 나면 어디엔가 도움을 청하는 등등의 단호한 결단을 내릴 수 있다.

p117
그러나 섣부른 위로보다 그 사람의 얘기를 잘 듣고 ‘그래서 아팠구나, 나라도 그랬겠다’ 하고 공감할 뿐이다. 겪어보지 못한 일을 두고 어떻게 판단하거나 조언할 수 있을까. 어떤 사연은 차마 말 건네기가 더 어려워 음악으로 답변을 대신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인생 무게에 비하면 말은 너무 가볍기 때문이다.

p120
“당신의 마음속 나이는 몇 살인가요?”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스물일곱 살이라고 답하겠다. 스물일곱. 10대 후반부터 고단했던 만큼 나는 지친 사람 속을 잘 알아보고 가끔 세상이 장기판의 졸장기만 해보여 시건방도 떨었었다.
...
남편에게 ‘마음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열일곱이란다. 나보다 더 철딱서니다.

바람처럼 스쳐 지나는 한평생, 기력이 쇠한 모습이나 나이 든 모습을 영정사진으로 할 필요가 있을까. 육신의 옷을 벗어놓고 가는 길, 돌아볼 때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웃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받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일 것이다.

p123
살면서 힘든 날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다. 어떻게 쉽기만 할까? 인생길 다 구불구불하고, 파도가 밀려오고 집채보다 큰 해일이 덮치고, 그 후 거짓말 같은 햇살과 고요가 찾아오고 그러는 거 아니겠나. 도망간다고 도망가질까.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해도 시간의 힘으로 버티는 거다.
...
스스로 딛고 일어나기 힘들다면 자신을 붙잡아줄 누군가의 손을 꼭 잡길 바란다. 내 편을 들어줄 한 사람만 있어도 살 힘이 생긴다. 곁에서 고개 끄덕이며 얘기를 들어줄 사람,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길 가다 모르는 할머니가 건네는 웃음, 사탕 하나에도 ‘살아 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인생이리라. 넘어졌을 때 챙겨주는 작은 손길에도 어두운 감정들은 금세 사라진다.

p125
과거의 나에게

  과거의 나를 만난다면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너 하고 싶은 것도 좀 하면서 살아.

  다 참고 접으면서, 동생들, 엄마 생각으로 집안 일으킨다고 기쓰고 살지 말고.
  하고픈 것 한 가지쯤은 해.

  일에 미쳐서만 살지 말고. 일이 너의 구원이냐? 그러다간 언젠가 일이 네 머리채를 낚아챈다. 일에 끌려 다닌다고! 알아들어?
  입고픈 옷도 사라.
  맨날 아는 언니네 형부 옷들 물려받지만 말고(나는 서른이 되어서야 내 옷을 처음 사 봤으니까).

  걷는 것 좋아하니 걷기 여행을 많이 해 봐.
  자전거 못 타는 게 평생 콤플렉스니까 제대로 배워서 국토 횡단, 종단 다 해보자.
  이상 끝!

p138
늘 담백한 냉면 같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지만 그렇게 되기가 쉽지는 않다. 함께 살아갈 친구들도 냉면처럼 단순하게 꾸려가고 싶다. 이 사람 저 사람 필요 없이 나를 알아주고, 마음 붙이고 살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한 명이라도 좋다. 고명 하나 없는 냉면처럼 나의 일상도 군더더기는 털어내고 담백하고 필수적인 요점에만 집중하고 싶다.

  꾸밈없고 기본이 탄탄한 담백한 냉면 같은 사람이 분명 있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솔직한 사람, 어떤 경우에도 음색을 변조하지 않는 사람, 그런 심지 깊은 아름다운 사람.

p155
그 사람은 나를 국민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짝꿍 같다고 했다. 우리 엄마가 “왜 진작 만나지 그랬어? 어디 있다가 인제 나타나, 그래?” 하고 때 아닌 투정을 하시자 그 사람이 한 말이다. 국민학교 때부터의 짝꿍…… 진작부터, 아주 오래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사이.

  “그 사람, 레몬 같아. 육질이 아니야. 식물성이야. 상큼해.”

  주위 사람들에게 남편 될 사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곤 했다. 나는 상큼한 사람과 결혼했다.


p171
일상생활의 밑바탕, 살아 있는 이야기, 삶의 고비들이 밑에서 든든하게 받쳐주어야만 방송에서 하는 말도 살아난다. 일상이 정지된 화면에서 맴돌면 우리 직업군의 사람들은 뭔가 맛이 없는 밍밍한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p173
새해가 되었다. 365일을 살고, 칸을 나누듯 해가 바뀌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다가도, 그렇게 나누어야 어느 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록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시점에서 새해가 됐으니, 앞으로 무얼 어찌하겠다는 계획과 바람을 꼽아봄직한데 솔직히 아무 생각도 없다.

p181
주변에서 나를 두고 하는 말들은 많지만 난 그저 나이고 싶다. 노래와 삶이 다르지 않았던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노랫말과 그 사람의 실지 생활이 동떨어지지 않는 가수. 꾸밈없이 솔직하게 노래 불렀고 삶도 그러했던 사람.

  물론 어떻게 기억되고 싶다고 해서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노래는 어디까지나 듣는 사람, 되불러주는 사람들의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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