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독 14. 아무튼, 달리기]
p.13
때로는 그런 작은 불꽃이 삶 전체로 번지는 불길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날들의 연속임을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이 지난한 하루하루 속에 삶의 변곡점이 되어줄 놀라운 순간들이 숨어 있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 달리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 변곡점이 늘 거창하거나 대단한 사건만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너무도 보편적인 일상의 한 장면일 수도, 심지어 어디 가서 말하기도 민망한 계기일 수도 있다.
p.16
아침 달리기는 하루를 시작하는 일이다. 몸을 일으키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일어나고 나면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일상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다. 이불을 박차고 게으름의 늪을 빠져나온 이에게 아침 달리기는 삶의 주도권을 손에 쥐여준다.
p.17
반대로 한밤의 달리기는 하루를 매듭짓는 일이다. 아침 달리기가 막 깨어난 생기와의 조우라면 한밤의 달리기는 숨죽인 듯 고요한 레이스다. 아침 러너가 다가올 하루를 낙관의 물감으로 물들일 때, 밤의 러너는 이미 과거가 된 하루를 차분히 쓸어담고 정리한다.
p.18
일상에서 숱한 파도를 겪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느 순간 무척 작고 초라해진 내 모습과 조우한다. 스트레스야 어떻게든 잊거나 풀면 그만이지만 내가 무너지고 소멸하는 기분마저 들 때면 어찌할 줄 모르고 발만 굴렀다.
뛰는 순간 만큼은 근육부터 호흡까지 몸의 변화에만 집중하며 생각을 비워냈다. 멘탈에 놓는 모르핀 주사처럼, 도무지 떨치지 못하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달릴 때는 잠시나마 자취를 감췄다. 더불어 목표했던 거리를 어렵사리 완주해내면 그 자체만으로 용기를 얻었다.
자존감의 회복은 위대한 성과만으로 가능한 게 이리다. 오히려 일상에서 마주치는 작은 성취가 금 간 마음의 빈틈을 메우고, 그런 성취들이 모여 단단한 삶의 방파제가 되어준다. 짧은 거리라 할지라도, 혹은 빠른 속도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세운 목표를 어떻게든 달성할 때면 어김없이 자기애를 손에 쥐엇다.
p.27
조금 느리더라도 꾸준히 하면 언젠가는 닿는다. 달리기란 원래 그런 운동이니까.
p.45
요즘은 안정된 페이스로 꾸준히 달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둔다. 느리고 답답할지언정 결국 자신만의 속도로 성취해내는 이들에게서 작은 힘을 얻는다.
p.73
우리 모두에게는 성장의 욕구가 있다고 믿는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시픈 욕심이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어디론가 이끈다. 하지만 성장은 언제나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 문제라면 그 지난한 과정이 성장을 보장하지도, 현재의 진행 상황을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달리기는 하루하루 달라진 나와 만난다. 특히 막 달리기를 시작했다면 글자 그대로 '나날이' 성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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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맛본 성장의 중독성은 너무도 강력했다. 목표 하나를 넘어서면 이내 다음 목표를 찾아나섰다. 그 과정에서 내게도 목표, 성장, 성취, 다음 목표라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p.75
LSD가 폐를 확장시켜 장거리 주행이 가능하게 몸을 만드는 작업이라면 인터벌은 심폐 능력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며 단단하게 굳히는 과정이다. 그렇게 몸은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쫀쫀하게 단련되어 간다.
p 87
어릴 때부터 재능의 부재를 한탄했다. 예나 지금이나 닥히 잘하는 게 없다. 허우대는 멀쩡한데 뭘 하든 어설픈, 반에 한 명쯤 있는 그런 애가 나였다. 그 대신 마음에 꽂힌 건 늘 성실히 했다. 남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꾸준히 오래 하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재능이 없으니 성실히라도 살자는 자기객관화였을까. 어린 시절 특기란에는 '열심히 하기'라는 다섯 글자만이 언제나 수줍게 적혀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꾸준함도 또 다른 형태의 재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재능이 비옥한 토양이라면 성실함은 하루하루 땅을 살피는 태도다. 비옥하지 않다하여 농사를 못 짓는게 아니고 비옥하다 하여 매해 풍작을 거두는 게 아닌 것처럼, 모든 결과가 재능에만 기대진 않는다. 재능이 모든 걸 결정하지 않고 재능없는 사람이 영원한 루저로 남으라는 법도 없다. 지난 삶 속에서 확실하게 목격한 사실이 있다면 재능만으로 나아가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 반복의 힘을 믿고 꾸준히 해나간 사람은 필연적으로 재능 그 이상의 지점에 가 있다는 것.
p.89
달리기는 내 앞의 누군가를 제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세운 목표, 혹은 과거의 나와 벌이는 대결이다. 대결에서 패했다면 그건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콧구멍을 핑계 삼아 더 나아가지 않은 태도의 문제다.
p.96
달리기는 고민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또 없는대로 제 역할을 다한다. 쉽지 않은 삶이지만 그래도 달리기처럼 기댈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 다행이다. 그 덕분에 나는 오늘 하루도 버텨냈다. 달리는 일에 이렇게 계속 빚을 지며 산다.
p.135
달리기를 향한 러너들의 마음도 예외는 아니다. 뜨겁게 사랑하고 모든 열정을 쏟아붓는 시절이 존재하듯 그 반대편에는 짜게 식은 마음과 성의없는 태도의 나날들도 있기 마련이다. 특히 마라톤처럼 큰 일을 치른 후라면, 더군다나 오랜 시간 준비해 목표까지 이뤄냈다면 어김없이 권태라는 감정이 날아든다.
p.141
슬럼프가 왔다는 건 자기 인생에 최선을 다했다는 증표라고. 런태기란 이름의 슬럼프는 지난 시간 당신이 정말 열심히 달렸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떨칠 수 없는 무기력에 자책할 필요가 전혀 없다. 여전히 달리기는 발걸음을 내딛던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p.143
'믿음'이다. 여러 질감의 믿음들이 우리를 마라톤의 출발선으로 이끈다. 대개는 나를 옭아맨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믿음, 42.195km를 달려 그 한계를 극복해내고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는 믿음이다. 그 신념이 여름과 겨울의 지난한 훈련을 버티게 하고 3시간 훌쩍 넘는 고난의 뜀박질을 가능케 한다. 마라톤이 기록보다 완주에 의의를 두는 것도 그래서다.
p.152
삶에서 결과는 종종 과정의 의미를 집어삼킨다. 달리기만 놓고 봐도 그렇다. 그동안 아무리 열심히 훈련했다 한들 대회 당일에 삐긋하면 결국 아쉬운 기록만이 남는다. 훈련하며 흘린 땀과 고통의 과정들은 초라한 결과 앞에서 허무하리만큼 빠르게 그 의미를 잃고 만다.
...
속물 같긴 해도 결국 내가 발 디딘 세상에서는 과정보단 결과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삶의 원리를 거스를 순 없을지언정 과정의 의미를 기억하고 되새기는 건 꽤 중요한 일이라 믿는다.
p.155
달리기는 순환의 고리를 그려가는 일이다. 우선 달리는 행위 자체가 양팔과 다리, 호흡의 끊임없는 반복으로 이뤄진다. 달리기를 취미로 삼는다는 건 이 반복의 움직임을 매일 반복함을 의미한다. 러너로서 그려나가는 궤적 역시 돌고 도는 순환의 이야기다.10km에서 시작해 하프마라톤, 최종적으로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하며 하나의 사이클을 완성한다. 그 뒤로는 다시 단거리로 돌아가 더 나은 기록에 도전하며, 또 한 번의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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