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마지막 책.
21년도 22번째 독서, 김혼비 작가의 '아무튼, 술'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완독] 아무튼, 술-김혼비
p60 _ 나는 어려서부터 힘내라는 말을 싫어했다. 힘내라는 말은 대개 도저히 힘을 낼 수도, 낼 힘도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서야 다정하지만 너무 느지막하거나 무심해서 잔인하게 건네지곤 했고, 나를 힘없게 만드는 주범인 바로 그 사람이 건넬 떄도 많았다. 나는 너에게 병도 줬지만 약도 줬으니, 힘내. 힘 들겠지만 어쩄든 알아서, 힘내. 세상에 "힘내"라는 말처럼 힘없는 말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때만큼은 "힘내"라는 말이 내 혀끝에서 만들어지는 순간, 매일매일 술이나 마시고 다니던 그 시간들 속에서 사실 나는 이 말이 듣고 싶었다는 걸,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무슨 의도로 말했든 상관없이. 그냥 그 말 그대로, 힘내.
p61_그날 이후 몇 달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어쩐지 나는 좀 힘을 내기 시작했다. 당장에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무너지기 직전의 다리를 가까스로 건너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힘내라는 말과 그 비슷한 종류의 말들을 더 이상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아무런 힘이 없어 누군가의 귀에 가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말일지라도, 떄로는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쉬운 말밖에 없을지라도, 이런 쉬운 말이라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언젠가 가닿기를, 언젠가 쉬워지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소망이 단단하게 박제된 말은 세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바닥에라도 굴러다니고 있으면 나중에 필요한 순간 주워담아갈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쩄뜬 우리는 언젠가 힘을 내야만 하니까.
p80_그 사람이 집 안에 숨겨두거나 남겨둔 모습 말고 그가 집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기로 선별한 모습, 딱 그만큼까지만 알고 대면하고 싶은데, 집 안 구석 어딘가에 묻어 있는 무방비하고 지극해 개인적이고 내밀한 면모, 이 사람 또한 인간으로서 나름 매일매일 실존적 불안과 싸우고 있으며 누군가의 소중한 관계망 속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라는걸 상기시켜주는 흔적을 봐버리면 필요 이상의 사적인 감정과 알 수 없는 책임감 비슷한 감정이 생겨 곤란하다. 게다가 집은 대게 말이 많다. 모든 사물들이 집주인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는 걸 내내 듣다오는 건 제법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p166_바짝 벼려져 있던 사람들이 술을 한 잔 두 잔 세 잔 마시면서 조금씩 동글동글하고 뭉툭해져가는 것을 보는 것이 좋다. 술이 우리를 조금씩 허술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그래서 평소라면 잘 하지 못했을 말을 술술하는 순간도 좋다.
읽으려고 카트에 담아두고 보관만 하고 있던 김혼비 작가의 책 두 권, '아무튼, 술' 과 '전국 축제 자랑'. 재밌단 얘기를 듣고 읽어보려 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선물 고르면서 이제야 구매하고 읽어보게 됐다. 작가의 술에 대한 경험을 담은 에세이이다. 일단 재밌고 가볍게 읽어볼 수 있어 좋았다. 작가의 가치관과 사람과의 관계, 술에 대한 생각을 느낄 수 있었다. 술에 대한 본인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담고 있는데 나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공감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와 관련된 술 경험들도 몇가지 떠오른다. 내 인생에도 술은 빠질 수 없는 하나이다. 특히 대학시절 가까워진 관계는 술이 큰 역할을 했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사람들과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나를 이끌어가고 있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여전히 나는 술을 좋아하지만 요즘엔 건강하게 마시고 있진 않는 내 모습이 자꾸 생각났다. 술을 좋아하고 앞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내년엔, 조금은 건강하게 술을 마시는게 좋을 거 같다... 급반성으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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