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 - 최진영
p27
일화는 노력하면서 노력하는 자신을 비웃었다. 1등을 놓치지 않으면서 1등을 놓치지 않으려는 자신을 경멸했다. 어른이 되면 잘 살고 싶었지만 어른이 될수록 불행해질 것 같았다. 자기는 노력하는 인간이니까. 결국 오태수 같은 애들이 치고 올라갈 테니까.
p28
월화는 소문을 지어내는 아이들보다 소문을 믿어버린 친구들 때문에 마음을 태웠다. 월화와 친한 친구들이었다. 학교와 학원에서 거의 붙어 지내기에 월화의 일상과 취향과 고민을 잘 아는 친구들. 바로 그들이 소문을 믿고 월화를 의심하는 편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월화가 울먹이며 서운함을 표현하자 친구들은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네 가슴을 본 적이 없잖아. 네가 정말 억울하다면 거기에 문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
안도가 아니라 실망하는 표정이었으니까. “내가 봤는데 문신은 없더라”라는 말은 퍼지지 않았다.
...
기나긴 생각 끝에 월화는 결론을 내렸다. 그들이 소문을 지어내는 이유는 심심해서다. 월화의 하루하루가 그러하듯이. 심심해서 상상했고 지어낸 이야기를 퍼트렸고 그것을 거듭하다 보니 진심으로 월화를 싫어하게 되었다.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심심할 수가 없다.
p68
미수는 그저 들었다. 복일과 있을 때 소환된 적도 물론 있었다. 잠든 자기 곁에서 복일이 사소한 이야기를 정성껏 하고 있을 상상에 잠시나마 안심이 됐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수는 복일의 목소리를, 실없이 웃긴 이야기를 떠올렸다. 소환이 끝나면 옆에 복일이 있을 것이다. 나쁜 꿈을 꾸었느냐고 물어보겠지. 그럼 웃으면서 대답해야지. 그렇게 나쁜 꿈은 아니었던 것 같아. 결국엔 내가 사람을 구했거든. 그럼 복일은 자기가 꾼 적 있는 인상적인 악몽을 말해주겠지. 복일은 어떤 악몽을 품고 살까? -
p97
나비에 스토크스 방정식이라고, 3차원에서도 해가 항상 존재하는지를 아직 증명하지 못했대요. 그러니까…… 답이 없어도 비행기는 나는 거죠.
목화는 남자의 말을 되풀이했다.
답이 없어도 비행기는 나는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가 말했다.
이유를 몰라도 좋은 건 좋은 거고.
목화가 말을 이었다.
왜 사는지 몰라도 계속 사는 것과 비슷하네요.
p124
꿈속에서 금화는 목수에게 말했다. 영원한 건 오늘뿐이야. 세상은 언제나 지금으로 가득해.
p130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사랑이 아니었음을 안다.
어떤 사랑은 끝이 없어서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끝이 없다.
어떤 사랑은 너무 가까이 있어 시작이 없다.
p133
나무는 지구에서 가장 키가 크고 오래 사는 생물. 나무는 동물과 바람에 씨앗을 묻혀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가로지른다. 봄에는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열매를 맺고 가을이 오면 잎을 떨어트리고 겨울에는 멈추었다가 봄이 오면 다시 피어난다. 폭풍, 짐승, 해충, 세균, 박테리아, 인간에 의해 나무는 일상적으로 상처를 받고 그것을 치료하는 데 평생을 쓴다. 보이지 않는 곳에 나이테를 만들면서, 땅속 깊이 더 멀리 뿌리를 내리면서, 하늘 높이 더 멀리 잎을 틔워 올리면서 오직 한자리에서 수천 년을 살아가는 나무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p150
인간만이 목적이나 의미를 생각하고 덫에 걸린다. 굴레에 갇힌다. 고통을 느끼고 죄책감에 빠지며 괴로워한다. 자주 저항한 만큼 이 일에서 간절하게 벗어나고 싶었던 미수가 뒤늦게 깨달은 방법은 아직 하나뿐이었다.
나이 드는 것.
p159
자기 인생에 자꾸만 그어지는 빗금이 무서웠다. 실패하고 싶지 않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은 점점 늘어나고, 이제는 자기 자신부터 통제하기 힘들었다. 일화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어긋났다. 예측 불가능하고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재난이 닥쳐오는 것만 같았다. 삶이라는 폭풍. 내일이라는 폭우. 타인이라는 지진. 잠을 자지 못하면 일을 할 수 없었다.
p164
하지만 한 번뿐인 인생, 그것 없는 삶은 내 것이 아니다. 모두 자기만의 삶을 산다. 상대의 삶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다들 너무 쉽게 판단하지. 불행할 거라고, 행복할 거라고, 부족한 게 뭐냐고, 부족한 것투성이라고. 루나에게 왜 약을 먹었느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그럴 만하다’라는 생각이 들 것만 같았다. 마찬가지 이유로 ‘그래도 그런 선택을 하면 안 된다’라는 생각을 버릴 수도 없을 거였다. 목화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생각했다.
p172
제주도의 창세 신화에는 대별왕과 소별왕이라는 쌍둥이 형제가 등장한다. 인간 세상을 누가 다스릴지를 두고 대별왕과 소별왕은 내기를 한다. 소별왕은 대별왕을 속여서 내기에 이긴다. 동생의 속임수를 알고도 속아준 선한 형은 저승의 주인이 되고 이기심과 욕심으로 형을 속인 악한 동생은 이승의 주인이 된다. 그러므로 저승은 선하고 거짓 없이 맑은 곳. 이승은 거짓과 욕심과 이기심으로 탁한 곳. 그 신화에서 목화는 죽은 사람에 대한 산 사람의 사랑을 느꼈다. 당신이 죽어서 가는 그곳은 맑고 선한 곳이길 바라는 마음. 이곳에서 당신을 괴롭히던 경쟁과 이기심과 욕심에서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기원. 대별왕의 저승은 마치 우주 같았다. 우주에는 이치와 균형만이 있다. 지구 대기권 밖의 우주에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쓰레기조차 쓰레기가 아니다. 먼지도 가스도 들끓는 불도 얼음도 빛도 어둠도 한없이 맑다.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하는 힘’이 사람의 세상에서는 중요하겠지만, 그 세상을 만들고 품은 우주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p194
어쩌면 그저 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를 보고 있다고. 생명체라는 전체가 아니라, 인류라는 종이 아니라 오직 너라는 한 존재를 바라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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