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독서

2024 완독 14 - 우리는 약속도 없이 사랑을 하고 / 정현우

huiyu 2024. 6. 4. 20:47


 F감성 찐한 책 ! 가끔은..?

 p18.
  너는 온 힘을 다해 사랑한 것이 아니었니.
  우리의 시간은 언제든 돌릴 수 있는
  한 편의 아름다운 영화가 아니니까.
  지루하고 긴 세상의 여름은 언제 멈출 수 있을까.
  나도 언젠가는 알게 될까.
  천국은 영화 속에만 있는 거라고.
  한순간 반짝하고 마는
  빛의 잔상일지라도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서글프겠지.

p19
  그래, 우리의 영사기가 꺼져도
  뒤를 자꾸 돌아보게 하는 장면이
  여전히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거야.
  우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자꾸 확인해보는 거야.

p21
붙잡고 있던 것들을 놓아야 한다는 것은 언제나 버거운 일이겠지. 그런 마음은 나의 손금 사이로 은빛 물고기가 빠져나가는 일과 같아,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독이나 외로움 같은 감정들도 비슷한 걸까.

p22
  사랑이라느니 기쁨이라느니
  그것을 증명해낼 수 없는 거잖아.
  우리는 항상 위태롭고 아름다우니까
  당연히도 알 수 없는 정답이라고 생각해.
  살면서 가장 뜨거운 심장을 가지는 사람을,
  괴로워 잠을 이루지 못하던 새벽을,
  잿빛 하늘 속에 타오르는 새들을.
  내가 그 사람을 언제부터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었는지
  우리의 끝과 시작이 어느 낮에서부터
  밤의 시간이었는지
  그 시간으로부터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너는 정확히 말할 수 있어?
  세상에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이 몇 개나 될까.

  사랑을 슬픔으로 증명할 수 있는 건
  아주 특별하지 않은 일.

  그냥, 우리가 시리도록 사랑했던 그 시절

  기쁨 하나.

p35
내가 숨 쉬는 동안 엄마라는 단어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안 되는 것이다. 내 곁을 항상 지켜야 하고 내 옆에 있어야 그게 정말 엄마다운 거니까. 엄마다운 거라는 게 뭘까. 엄마가 없는 시간이 내게도 온다고 생각하니, 당연했던 마음들이 모두 무너졌다. 엄마가 할머니를 보내는 것도, 누구보다 열심히 설거지를 하는 것도, 나를 기르는 시간 동안 끝없이 나를 향해 눈빛을 보냈던 것도. 혼자 엎드려 있는 먼 폐허, 빈집을 열고 들어가면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조금 더 늙고 가여운 엄마의 얼굴도. 엄마도 엄마로 태어난 것이 처음일 텐데. 엄마도 이제 누구의 딸이 아닐 텐데. 모두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다.

p44
엄마도 한때는 흰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비이고 싶었을 텐데. 솜사탕처럼 떠 있는 구름들을 떼어 먹기도 하면서. 콩잎들 사이에 핀 유채꽃들처럼 하늘거리고 싶었을 텐데. 엄마가 혼자 분리수거함을 뒤지던 날, 나는 처음으로 당신과의 결별을 다짐하였지만, 나는 당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생(生). 내가 없는 그날의 콩잎들은 나의 모진 마음을 알았을까. 그래서 더 깊게 우거졌을까.

p74
우습고 정겨운 맹꽁이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누군가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행복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얼마나 많은 행복과 행운을 꿈꿨는지. 왜 신은 내게 행복을 한 번에 주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나의 고요 속에서 소용돌이치곤 했다.

p92
  붙들고 싶은 눈빛을
  책갈피로 만들 수 있다면
  언제든 넘겨볼 수 있는
  페이지 어딘가에 넣어두고 싶었습니다.
  꾸다 만 꿈들이
  당신의 눈매에 머물다 가는 저녁에.

p93
우리가 눈을 감는 이유
서로를 껴안을 수 없는 등을 가진 우리는, 한참이나 멀어지고 있는 그 사람의 등을 보면서 생각한다. 온전히 되돌릴 수 있는 건 슬픔뿐이라고. 지나간 것들은 붙들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 준비하지 않은 떠남을 미워하지 않는 것, 한때는 나의 일부가 뜯겨 나간 자리를 마주해야 한다는 건, 결국 슬프고 괴로운 일. 너의 모든 것이 내가 될 수 없으니, 우리 눈을 감게 되는 일.

p95
너는 나를 혼자 내버려두겠지만.
네가 나를 다시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아. 한 시절 그때의 너는 내게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 서로의 순간에 머물렀던 시간과 공간은 끝이 나고야 말겠지. 기쁨으로 가득한 나를 거기에 내버려두고 올 테니까.

p101
성실한 슬픔
슬픔을 잊는 방식이 더딘 사람도 있고, 성실하게 슬픔을 비워내는 사람도 있다. 멀리서 걸어오는 너의 얼굴이 그립지 않고 첨벙이는 노래들이 이제 들리지 않을 때, 이토록 사소한 하나에 반응하고 더 이상 그 대상을 사랑할 수 없음을 알게 될 때, 잊는 것 또한 아주 평범해진다. 나도 모르게 닳아버린 칫솔처럼. 잊는다는 건 아주 평범하고 사소하게 휘어진 사랑. 사랑은 습관이 될 수 있으나 이별은 습관이 될 수 없으니, 그래서 잊는다는 건 성실하게 앓는 것. 우리는 묵묵히 흐른다. 아주 평범하고 성실히.

p102
사람의 마음과 마음 사이에 얼음 장막을 한 꺼풀 벗겨내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를 떠난 것들이 너무 많아 어쩔 도리가 없이 그 자리에 얼어버리게 되는. 닿을 수 없는 마음은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간밤의 꿈이었으면 좋겠지만, 겨울 수평 너머에서 건너올 수 없는 영혼들은 푸른 얼음물에 잠겨 출렁이고. 오르골 속에서 춤을 추다가 멈추어 서 있겠지

p109
나는 버려진 것들을 사랑한다. 버려지는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거나 혹은 대신할 것으로 마음이 옮겨갔기 때문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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